센, 김용균재단 활동가
김용균재단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산재 피해 유가족을 지원하는 활동도 하고,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지우고 위험이 반복되지 않도록,
그래서 모두의 일상이 안전하도록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활동을 합니다.
노동안전보건 활동을 하는 단체에서 상근을 한지 딱 6년이 되었다. 그 전에 있던 단체도 비슷한 범주의 활동을 했으니 합하면 어느새 9년이다. 대부분의 사회운동을 하는 단체들이 그렇겠지만 이곳도 할 일이 없는 상태가 좋은 상태이다. 노동안전보건 활동을 하겠다고 만들어진 단체이니만큼, 산업재해를 예방하고, 노동자들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일터를 만들기 위한 활동은 활발하면 좋겠지만, 중대재해 대응활동 같은 일들은 할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유가족 투쟁 역시 그러하지만, 바램과는 무관하게 산업재해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을 꾸준하게 꽤나 많이 만나야 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고, 중대재해를 일으킨 진짜 책임자를 처벌하는 법을 만드는 투쟁을 했던 어머니, 마찬가지로 아들을 잃고 증거 자료를 조작하고 감추는 사측과 싸우며 직접 자료를 모으고 분석하고 투쟁과 소송을 했던 어머니, 뱃속의 아이를 함께 행복하게 키울 미래를 그리다가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고 거리에서 농성을 하고 회사를 상대로 싸웠던 부인, 아버지를 잃고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발로 뛰고 찾아다니며 고인의 명예를 지키고 회사의 무성의한 사과를 거부하고 싸웠던 딸, 세 아이의 엄마였던 부인을 잃고 혼자 휑한 회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며 최선을 다했지만 세 아이를 위한 일상을 살아야 했기에 싸움을 지속할 수 없었던 남편, 형이 일했던 낯선 땅에 형이 일했던 회사의 사장을 만나러 왔던 동생…
베트남에서 한국을 찾아온 응우옌 반 뚜 씨1는 이제 겨우 21세의 청년이었다. 뚜 씨는 일본에서 2년간 농사일을 했다. 2,800만 원을 들여 한국으로 떠났던 형에게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그는 일본을 택했었다. 그러나 가족 모두 한국에 그만한 기대가 있었고, 형인 응우옌 반 뚜안 씨 역시 한국에서 일하며 뚜 씨에게 일본에서의 계약 기간이 끝나면 한국으로 와서 같이 일하자고 했다. 그러나 뚜 씨가 방문한 한국에는 이미 뚜안 씨는 없었다. 뚜안 씨도 고작 23세였다.
형이 일했던 공장에서 뚜 씨는 흙먼지 가득한 커다란 컨베이어벨트 설비를 보고 형이 어떻게 일했는지를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형은 경기도 이천의 자갈제조 공장에서 12시간 맞교대로 일했다. 야간조였던 지난 3월 10일 새벽 혼자 컨베이어벨트 점검을 하다가 사고를 당했다. 위험한 작업은 2인 1조로 해야 한다는 원칙 같은 것은 지켜지지 않았다.
뚜 씨는 형이 지내던 기숙사의 쓰레기통에서 형이 쓰던 모자를 발견했다. 쓰레기통에 있던 모자마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영상통화를 할 때마다 쓰고 있는 걸 봤었다. 유품들은 정리되어 고국의 가족들에게 보내졌지만 빠진게 있었던 것이다. 월급을 받으면 15만원을 남기고 가족들에게 모두 보내며 가장 역할을 했던 형의 자리를 이제 둘째인 뚜 씨가 채워야 한다. 뚜안 씨의 꿈과 뚜안 씨가 살았을 미래가 한 순간에 사라지며 뚜 씨의 미래도 바꿔 놓았다.
2020년 10월, 코로나19로 쿠팡물류센터의 물량이 급증하던 시기 쿠팡 칠곡물류센터에서 일하던 27세의 청년, 덕준 씨2가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져 가족들의 곁을 떠났다. 그는 저녁 7시부터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심야노동을 하며 하루 400kg에 달하는 짐을 옮겼다. 주 62시간씩 일했고, 체중이 1년 동안 15kg이나 줄었는데 그 중 5kg은 7, 8월 여름을 지내며 빠졌다. 혹독한 노동강도에 젊은 청년이 과로로 쓰러졌는데 쿠팡은 무리한 다이어트로 인한 사망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유족에게 아주 기본적인 것 이외에 어떠한 자료도 내놓지 않았다.
나중에 민사소송을 제기하고 나서야 CCTV영상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어머니 미숙 씨는 아들의 생전 영상을 수백 번씩 돌려보며 걸음 수를 세고 일했던 것을 분석했다. 그렇게 말수가 많지는 않았던 미숙 씨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마이크를 잡고 아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가지가지 하는 쿠팡물류센터의 혹독한 노동현실과 쿠팡의 거짓말과 행태에 대해, 산재 유가족의 아픔과 투쟁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버지 장광 씨는 본인의 트럭을 쿠팡을 규탄하는 내용으로 도배를 하고 전국을 돌며 순회투쟁을 했다. 남겨진 동생들은 맏이의 부재와 함께, 부모의 부재를 겪게 되었다. 덕준 씨는 어떤 미래를 꿈꿨을까.
동우 씨3도 금희 씨와 함께 아이를 키우며 알콩달콩 살아가는 미래를 꿈꾸었을 것이다. 동우 씨는 동국제강 포항공장에서 일을 하다 2022년 3월 사고를 당했다. 금희씨는 동우씨와 함께 포장마차를 했던 것도, 밤이면 같이 맛있는 안주를 앞에 놓고 한잔씩 기울이던 시간들도 마냥 행복했다. 육아가 쉽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힘들어도 남편 동우 씨와 함께 잘 헤쳐 나갈 수 있을거라 믿었던 금희씨는 당시 임신 2개월이었다. 몇 번의 아픔 끝에 어렵게 찾아온 아이였기에 더 각별했다. 그러나 금희 씨가 꿈꾸던 미래는 순식간에 불가능한 미래가 되어버렸다.
회사는 동우 씨를 탓했다. 뭔가 점점 더 잘못되고 있다고 생각한 금희 씨는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 큰아버지와 함께 무작정 상경했다. 서울에 있는 본사 앞에 분향소와 농성장을 차렸다. 아직 추위가 다 가시지 않은 4월 초의 아스팔트 위에서 봄을 나고 여름을 맞이했고, 시어머니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자리를 끝까지 지켰다. 결국 회사의 사과도 받아냈지만 무슨 소용인가. 동우 씨는 돌아올 수 없다. 아이는 다행이 건강하게 자라 이제 유치원에 다니는 나이가 되었다. 금희 씨의 꿈은 많이 달라졌다.
전 세계가 K-POP에 열광하고 반도체와 같은 최첨단 산업을 비롯해 경제적으로도 강국이 되었지만, 한국은 여전히 산재 1위 국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고용노동부 발표에 따르면 2026년 1분기 재해조사 대상 사고사망자가 113명으로 집계되었는데 이는 2022년 통계 작성 이래 최저 수치라고 한다. 산업재해를 파악하는 기준은 몇 가지 있지만 어쨌든 산안법을 전면 개정해도,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어도 줄지 않던 산재 관련 수치가 유의미하게 줄어든 것이다. 이전의 정부에 비해 노동안전과 산업재해 문제에 대해 수많은 정책과 계획을 쏟아내고 있긴 하다. 보여주기식 사업으로 그칠만한 것들도 있고, 근본적인 대책은 되지 못하는 문제들도 있지만 실제로 노동계에서 요구해 왔던 것들도 있다. 말잔치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산업재해 감소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다만 아무리 산재가 줄었어도 기쁜 듯이 표현할 수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산재로 사망한 한명 한명의 노동자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세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산재는 줄이는 것이 아니라 없어져야 한다.
4월 28일은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이다. 지난해부터 2년째 산재피해 유가족들이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산업재해에 대한 인식은 굉장히 낮아서, 회사들은 산재가 발생하면 숨기거나 축소하기 급급하고, 유가족이 나서서 목소리를 내면 돈을 노린다고 매도한다. 대부분의 산재가 단순한 실수가 아닌 반복되는 위험과 구조적 문제로 발생하는 것임에도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는 고인의 탓으로 돌려지기 일쑤이다. 산재를 겪고 투쟁에 나선 유가족들은 살던 곳에서 그대로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여러 가지 부침을 겪으면서도 슬픔에 머물러 있지 않고 거리로 나선 유가족들이 있었기에 산업재해와 관련한 투쟁은 전환점을 맞이하기도 했다.
5월 1일 노동절의 이름을 되찾은 것 기념한다는 정부의 노동절 행사에는 참여를 거절했지만, 4월 28일 산재 사망 노동자를 추모하는 자리에는 유가족들이 참여한다. 기뻐할 일은 아니지만 국가 차원에서 산업재해로 희생된 노동자들을 추모하고, 유가족들을 존중하는 자리는 의미가 작지 않다.
2년 쯤 전에 단체에서 만든 배지에는 ‘오늘도 안녕’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별일 없는 평온하고 안전한 하루, 퇴근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거나 가족, 지인들과 웃음을 주고받는 그 소박한 일상에 대한 바람이 담겨 있다. 모두가 안녕한 그런 일터, 사회가 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위험할 때는 일을 중단하거나 천천히 하고, 아플 때는 좀 쉬기도 하고, 조금 덜 이윤을 남기면 된다. 그렇게 서로서로의 안녕을 바라며 오늘도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가족의 빈자리는 무엇으로도 채워지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그 유가족의 곁에는 함께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와 같은 활동가도 있고, 현장의 노동자들도 있고, 시민들도 있다. 산업재해가 아니더라도 다른 참사의 유가족들도 있다. 함께 고인을 기억하고 애도할 수 있는 곁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세상은 다른 색깔과 온도를 갖는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그 곁에서 온기를 나누며 또 다른 사람들의 일상을 지킬 수 있도록 함께 하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내 가방에 달린 배지들을 소개하고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가운데가 2년쯤 전에 제작된 김용균재단 굿즈배지다. 당시 노동안전보건 활동을 하던 진영님이 이미지를 그리고 김용균재단4의 예진님이 뱃지에 맞게 이미지 처리와 글자를 입혀 제작했다. ‘일하다 죽지않게’와 같은 직접적인 문구도 고려되었지만(실제로 그 이전에 제작했던 뱃지에는 그 문구가 들어갔다) 산업재해 라는게 먼 누군가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 가까이 있는 그래서 모두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과 산재를 없애는 것이 다른 일이 아니라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 베트남에서 온 노동자 응우옌 반 뚜안 씨는 2026년 3월 10일 새벽 경기 이천의 한 자갈, 석재가공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숨을 거뒀다. 참고: 프레시안, <기계에 끼어 숨진 23살 뚜안의 마지막 길…”동생아, 이생에서 고생 많았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6031916054296382 ↩︎
- 2020년 10월 12일 장덕준 씨는 대구 칠곡에 위치한 쿠팡물류센터에서 야간근무 이후 자택에서 급성 심근경색으로 숨을 거뒀다. 쿠팡은 지속적으로 노동자들의 산재기록은 은폐하고 있다. 참고: 한겨례, <쿠팡은 냈다는데 받은 기록은 없어? 노동부, 장덕준씨 사망부실 조사 의혹> https://www.hani.co.kr/arti/society/labor/1244015.html?utm_source=copy&utm_medium=copy&utm_campaign=btn_share&utm_content=20260429 ↩︎
- 2022년 3월 21일 이동우 씨는 동국제강 포항공장에서 크레인 안전벨트에 몸이 감겨 숨을 거뒀다. 참조: 매일노동법률 <동국제강 이동우씨 사고 ‘2년’ 원청대표 결국 ‘면죄부’> https://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0282 ↩︎
- 김용균재단은 2018년 12월 10일 태안화력발전소 하청업체의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던 김용균 씨가 석탄 운송용 컨베이어벨트 점검 작업 중 사망한 후 김용균 씨의 어머니 김미숙 씨와 여러 시민들이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 운동을 벌이는 과정 중에 만들어진 단체다. 김용균재단후원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cOOUeQbTtZ-h9eVEeKasPe3koybH9PWQ_qmYm1S69pnv0MhQ/viewform 참조: 김용균재단 https://yongkyun.nodong.org ↩︎
